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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름다운 기부자 김만덕(1739-1812) 관리자

아름다운 기부자 김만덕(1739-1812)




한 희 숙(숙명여대 교수)

  요즈음 세계적으로 경제가 어렵다고 야단이다. 우리나라 경제도 정말 심각할 정도로 어렵단다. 그런데 사실 돌아다보면 인간은 풍요롭게 잘 살았던 시절보다 근근이 아니면 엄청 어렵게 살았던 시절이 더 길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역사의 기억은 멀고 현실은 가까우니 지금이 더 힘들게 느껴지는 걸까.  이렇게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생각나는 아름다운 여성이 있어 소개해 보고자 한다.

  김만덕의 초상이 백여년 전, 농업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고 그 번 돈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주었던 여성이 있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신분차별과 남녀유별의 유교적 문화 속에서 왕에게 벼슬을 받고 왕비를 만났던 평민 출신 - 천민 출신이라고도 전한다 - 의 여성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사업가이자 CEO라 할수 있는 김만덕이다.
  제주 여인 만덕은 1750년 전국을 휩쓴 전염병 때문에 부모를 잃고 기녀의 수양딸로 갔다. 만덕이 일도 잘 하고 가무와 거문고도 잘하자 기녀는 만덕을 역시 기녀로 만들려고 하였다. 만덕은 본래 양인의 딸이었기 때문에 기녀가 되기 싫었으나 가난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만덕은 어릴 때 어머니가 들려준 김천덕 열녀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었다. 김천덕은 본래 하인의 아니였지만 어느 해 남편이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죽자 3년 동안 머리를 풀고서 제사를 지냈다. 그 후에 부모가 다시 시집보내려 하자 목을 매어 죽으려 하여 끝내 그 뜻을 꺾을 수 없었다.이러한 열녀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만덕은 기녀로서 기예를 할 뿐 방만한 생활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천성을 버리지 않았다.
  기생이 된 만덕은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인기가 대단하여 이름을 날렸다. 관아의 연회는 물론 부잣집이나 양반집의 잔치에도 참석하였다. 서울에서 온 어사나 벼슬아치의 환영연과 송별연에는 거의 반드시 참석하였다. 모두들 제주도에도 이런 명기가 있느냐며 감탄하였다. 그러나 기생은 천인이었다.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싶은 만덕은 천인의 신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만덕은 자신으로 인해 집안이 천민으로 대우받는 것이 괴로웠다. 관가에 나가 기녀명단에서 삭제해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고 목사인 신광익과 판관 한유추를 찾아갔다. 그는 본래 양가 출신으로 부모를 잃고 가난으로 부득이 하여 기녀가 되었으나 위로 조상에게 부끄러우니 다시 양녀로 환원시켜 달라고 호소하였다. 만일 양녀로 환원시켜준다면 집안을 다시 일으키고 특히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목사와 판관은 그 호소를 받아들여 기적에서 빼주었다. 그러자 지체 있는 집안에서 청혼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만덕은 일찍이 결심한 바가 있어서 결혼을 하지않고 - 결혼을 했으나 일찍 혼자가 되었다고도 전한다. - 그동안 모아 두었던 약간의 돈으로 객주집을 차렸다.

  객주집 차려 큰 돈 벌어
  만덕은 제주목 관아 옆 포구에 객주를 차리고 육지 상인들과 거래를 시작했다. 명기였던 만덕이 객주집을 차렸다는 소문이 퍼지자 육지 상인들이 즐겨 찾아왔다. 상인뿐만 아니라 관원들까지 투숙하여 객주집은 날로 번창하였다. 만덕은 미역, 말총, 양태 등과 같은 제주도의 특산물을 판매하고 육지의 쌀과 소금 등 생필품을 구매하여 상품 간 시세 차익을 통해 큰 이익을 얻었다. 당시 미역은 일부 바다와 제주도에서만 채쥐할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말의 꼬리와 갈기털로 만드는 말총과 갓의 재료인 양태 또한 제주도의 독점적인 특산품으로 수요가 많았다. 전국 각 지방에서 오는 장사꾼들을 상대하다 보니 물건의 유통 경로와 교역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다. 만덕은 제주도 사람들의 물건을 적당한 값으로 사두었다가 육지의 상인들에게 싸게 팔았다.
  만덕은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이익을 적게 남기고 많이 파는 것, 둘째 적정한 가격매매, 셋째 정직한 신용본위가 그것이었다. 자연히 만덕의 객주집은 큰 규모의 거래소가 되었고 몇년만에 만덕은 제주의 거상이 되었다. 만덕은 사업에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었으나 일상생활은 언제나 검소하여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다. 그녀는 "풍년에는 흉년을 생각하여 절약하고, 편안히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며 어렵게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하여 검소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였다.

  제주를 덮친 최악의 흉년, 운명처럼 나타난 한 여인
  정조 19년(1795). 제주목사 이우현은 초조하게 진휼곡을 실은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악의 흉년으로 만 여명의 백성이 굶어 죽은 제주도의 실상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처참했다. 제주도는 농토가 척박하고 경지면적이 적은데다가 마침 제주를 강타한 태풍 때문에 수확을 앞둔 곡식은 짠 바닷물에 모조리 말라 죽고 말았다. 관의 허락없이 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백성들은 시체를 파먹거나 자식을 내버리는 둥 극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설상가상으로 진휼곡을 싣고 제주도로 오던 배 12척 가운데 5척이 풍랑을 만나 침몰하여 제주 백성들의 곤궁한 처지는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이때에 만덕은 '바로 지금이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가까운 사람들에게 부탁하였다. "보리고개까지 굶주린 사람들을 먹여야 하니 육지로 나가서 되는대로 양곡을 사오세요."
  1천금을 갖고 육지로 건너간 상인들을 한 배 가득 곡물을 싣고 돌아왔다. 만덕은 500석의 곡물 가운데 50석은 친척과 은혜를 입은 사람 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 450석은 모두 관가에 보내어서 구호 식량으로 쓰게 하였다. 구호곡을 받은 굶주림에 시달리던 제주민들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목숨은 만덕이 살렸으니 만덕은 우리 생명의 은인이다." 사람들은 만덕의 후덕함을 칭송하였다.
  제주 목사 이우현은 한양에 장계를 올렸다. "제주의 김만덕 여인이 곡식을 사서 450석을 냈고, 고한록은 300석을, 홈삼필과 양성범은 각각 100석을 내었으니 지극히 가상합니다." 양반도 아닌 일개 양민이, 그것도 여자가 가장 많은 곡식을 기부한 것이다.

  만덕의 소박하고도 큰 소원
  장계를 본 정조는 목사에게 "김만덕을 불러서 그 소원을 물어보고 어려운 일이더라도 특별히 시행하라. 그리고 고한록은 대정현감으로 임명하고, 홍삼필과 양성범은 모두 순장으로 승진 임명하라."고 명하였다. 만약 김만덕이 남자였다면 꽤 높은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심성으로 봤을 때 정치도 잘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성이었다.
  목사는 만덕에게 왕의 뜻을 전하고 소원을 물었다. 만덕은 "다른 소원은 없사오나 오직 한 가지 한양에 가서 임금님 계시는 궁궐을 우러러보고 천하 명산인 금강산 1만 2천봉을 구경하는것"이라고 하였다. 만덕은 제주도를 건너가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어 했던 것이다.
  당시 제주도 백성은 육지로 나가는 것이 통제되었고 특히 여자의 육지행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그 이유는 제주도가 척박하여 인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를 낳을 여성들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만덕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정조는 쾌히 허락하고 말을 하사하였고, 지나가는 지역의 관아에서는 만덕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라고 명하였다.
  만덕은 1796년, 관원의 안내로 제주를 출발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 58세였다. 해남, 강진, 영암, 정읍, 여산, 공주, 수원을 거쳐 한양에 올라왔다. 정조는 먼길의 노고를 위로하고 선혜정의 醫女班首 (내의원에 속한 수석여의)란 벼슬을 내렸다. 그것은 평민으로서 왕을 직접 알현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관직을 내린 것이라 한다.
  정조는 "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심을 발휘하여 천백여 명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호하여 귀중한 인명을 살렸으니 참으로 기특한 일이다."라고 치하하며 말과 함께 비단 5필을 상으로 내렸다. 왕비도 만덕을 만나보고 장신구를 상으로 주었다. 만덕은 한양에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에 강원도 관찰사의 배려 하에 금강산을 편안하게 구경하였다.

  아름다운거래, 아름다운 기부
  제주로 돌아온 후에도 만덕은 전과 다름없이 장사를 계속하였다. 검소한 생활로 자선사업에 주력하여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만덕은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무덤은 동문 밖, 성안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에 만들었다. 판관 이국표는 만덕의 행적을 비문에 새겨주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어려운 시대에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억척스럽게 경제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만덕은 특기할 만한 여성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상업의 원리를 잘 알고 이를 적절히 잘 활용한 점이다. 그리고 자신의 욕심을 떠나 나라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를 위해 모든 재산을 헌납했다는 사실은 더욱 높이 평가될 만하다.
  만덕은 출륙금지령이 내려져 있던 변방 제주섬에 사는 낮은 신분의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상업을 통해서 거부가 되었다. 사회에 재산을 환원함으로써 나라도 하기 힘든 구휼 활동을 하였다. 만덕의 삶이 성취한 최대치는 자신의 신분을 되찾은 것도, 금강산에 간 것도, 임금을 만나 벼슬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만덕이 진짜 아름다운 이유는 자신의 숙명뿐 아니라, 지독한 기근 속에 죽음만을 기다리는 수만의 제주 사람들의 숙명과도 맞섰다는 것이다.
  만덕을 큰 부자라 부르는 것은 그녀가 이루었 던 부와 그녀의 장사 수완을 칭송하는 것이 아니다. 만덕은 평생에 걸쳐 피와 땀으로 이룬 모든 것을 팔아 수천, 수만의 목숨을 사고자 했던 것이다. 만덕은 아름다운 거래를 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큰 사람이었다.
시대를 앞서 계급과 성 역할을 뛰어넘은 만덕의 의기와 선행은 당대 실학자들에 의해 시와 문장으로 전해진다.
  "귤 밭 깊은 숲속에 태어난 여자의 몸. 의기는 드높아 주린 백성 없었네. 벼슬은 줄 수 없어 소원을 물으니 만이천봉 금강산 보고 싶다네."(박제가)
  "넌 탐라에서 자라 한라산 백록담 물을 먹고 이제 또 금강산을 두루 구경하였으니 온 천하의 수많은 사내들 중에서도 이런 복을 누린 자가 있을까."(채제공)

  요즘 같이 모두가 어려운 시기에 나라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아름다운 거래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김만덕과 같이 모든 재산은 아니더라도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나마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더욱 밝아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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